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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 기억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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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 기억의 빈자리
  • 채동균
  • 승인 2024.03.1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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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그랬지만 놀이동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놀이동산 동물원은 온갖 동물을 보는 재미가 있었지만, 온종일 걸어 다니는 것이 힘들어서 싫어했던 기억이 있다. 한두 번 동물원을 다녀오고서는 의문도 들었다.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노는 일이 제일 즐거운 시절이었는데, 문득 동물원에 있는 동물은 사람의 볼거리일 뿐, 갇혀 지내는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 뒤로는 동물원에 가면 모든 동물의 표정에 슬픔, 무료함, 분노 같은 감정이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놀이동산의 다른 한 축을 차지하는 놀이기구는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아마도 트라우마 때문인 듯하다. 초등학교 입학 전으로 기억하는데, 처음 도전한 놀이기구는 ‘다람쥐 통’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범퍼카를 타고 싶었지만, 그 당시 새롭게 유행하는 놀이기구를 태워주고 싶은 부모님의 배려 덕분에 첫 번째 놀이기구 경험을 격하게 경험했다.

다람쥐 통이라는 놀이기구는 동그란 통에 두 명씩 들어가서 통이 빙글빙글 상하로 도는데 가족 모두 처음 이용해보는 것이라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었다. 한 자리에 체격이 비슷한 사람이 타야 안전벨트가 제대로 고정된다는 것이었다. 체격이 큰 부친과 같은 자리에 들어간 탓에 안전벨트는 나에게 있어서 매우 헐거웠고, 덕분에 통이 거꾸로 돌 때마다 몸이 ‘안전’벨트에서 빠져나와 안전하지 않은 상태가 되기 일쑤였다. 단언하건대, 평생 이용했던 모든 놀이기구 중에서 처음 타본 다람쥐 통이 가장 경악스러웠다. 놀이기구 첫 경험이 이러해서인지, 트라우마가 생긴 나는 정말 큰 일이 아니고서는 놀이기구를 이용하는 일이 없었다. 정말 큰 일의 범주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놀이공원을 간다거나 하는 정도를 의미해서 사는 동안 놀이동산에 개인적인 즐거움을 쫓아가는 일은 없었다.

성향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행도 즐기지 않는다. 출장 같은 상황에서도 되도록 기차를 이용하고, 가족 여행이 있어도 장시간 비행을 해야 하면 혼자 빠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유체역학의 베르누이 원리도 배웠고, 비행이 비교적 안전한 교통수단이라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고 있지만, 가끔 비행 중 만나는 난기류 앞에서 속절없이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기구가 되는 비행 경험은 놀이동산에 강제 입장하는 기분이 든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비행이라면 피하는 나였지만, 몇 번인가 용기 낸 일이 있는 그 중 한번은 쇼팽 덕분이었다.

피아노의 시인, 피아노의 마음, 피아노의 영혼이라 불리는 프레더릭 쇼팽. 비록 피아노 수업은 바이엘, 체르니에서 멈춰서 쇼팽의 경지를 경험해볼 수 없었고, 피아노와 쇼팽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음악가라는 정도만이 평소 내가 알고 있던 그에 대한 지식의 전부였다. 어느 날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쇼팽의 일생에 대해 보게 되었는데 그가 폴란드 출신이라는 것, 전쟁으로 고국을 떠나 음악 활동을 했다는 것, 39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으로 객지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생의 마지막에 쇼팽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당시 점령군인 러시아에서 막을 것을 걱정한 쇼팽은 자신의 사망 뒤에 시신이 고국을 돌아가지 못하면 심장만이라도 고국으로 보내 달라는 유언을 했고, 다행히 그 유언은 지켜졌다. 쇼팽의 심장은 폴란드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에 지금도 안치되어 있다.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

 

쇼팽의 일대기를 보는데 문득 마음이 뜨거워졌다. 1800년대를 살아간 음악가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마침 가족이 폴란드 여행을 계획했던 차에 가족과 함께할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전에 고국을 그리워하며 타지에서 식어간 음악가의 영혼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해 가족과 함께 폴란드 바르샤바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여행은 비행 내내 앓는 소리를 쥐어 짜낸 덕분에 시작부터 탈진하여 시작했다. 7시간 정도 되는 시차가 금방 가시지 않아서 여행 동안 멍한 순간도 많았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여행의 일정이 바르샤바에 이르렀을 때는 몸 상태를 회복했고, 쇼팽의 심장 앞에서 경의를 표하는 순간만큼은 또렷하고 경건한 마음을 표할 수 있었다.

여행 중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그 ‘베개’가 있는 풍경
여행 중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그 ‘베개’가 있는 풍경

바르샤바에 도착한 때는 여행 일정의 중반을 넘어서는 시점이라서 그날은 좋은 숙소를 정했다. 유스호스텔이나, 여행자들이 흔히 이용하는 단체 숙소에서 불편한 잠을 자다 호텔을 이용해서일까, 여행의 개인적인 목적이었던 쇼팽을 만나는 일을 이루어서일까? 바르샤바에서는 말 그대로 꿀잠에 빠졌다. 나 혼자만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아내 역시 그날만큼은 잠을 깊이 잤다는 것이다. 아마도 꽤나 긴 여정의 피로가 쌓였던 탓이라 싶었지만, 아내의 이론은 달랐다. “역시 호텔이라 그런지 베개가 좋아서 푹 잤어”라는 말에 평소 호텔 베개에 대한 불신이 깊었던 나는 베개는 경추를 지지해주는 베개가 좋지 호텔의 그 크고 퉁퉁한 베개가 숙면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는 다소 소신이 담긴 용감한 발언을 했다. 나의 소신 발언에도 아내는 호텔 베개에 대한 확신에 차 있었다.

2016년 여행 당시 부다페스트 한 식당에서 가족과 함께.
2016년 여행 당시 부다페스트 한 식당에서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녀온 뒤 문득 혹시나 특별한 베개였을까 싶은 호기심이 들었다. 예약했던 앱에서 숙소 정보를 확인하고 이메일로 호텔에서 사용하는 베개는 보통의 솜으로 꽉 찬 베개인지 특별한 종류를 사용하는지 물었다. 아내가 그 호텔에서 숙면을 취했는데 베개의 종류를 알 수 있으면 선물하기 위함이라는 사족을 덧붙였다. 오래지 않아서 회신이 왔는데 뜻밖에도 특별한 베개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은 브랜드를 알려주는 일은 없는데, 아내에게 선물하겠다는 말을 존중해서 어떤 브랜드의 베개인지도 알려주었다. 알고 보니 50년이 넘은 이탈리아의 전문 업체 제품이었다. 환율을 계산해보니 가격도 만만치 않았지만, 문제는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직구를 하려 해도 유럽 쪽에서 어떻게 직접 구매할 수 있을지 난감했다. 결국, 인터넷 세상을 여러 곳 수소문하다 그해에는 구하는 것을 포기했다.

베개의 브랜드 명을 적어두고, 매년 가끔 기억이 날 때마다 제품을 검색해보곤 했는데, 마침 2023년에 국내에서도 판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16년 여행에서 만난 베개였으니 7년 만에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잠을 선물하고 싶다는 일념보다는 아내의 꿀잠 이론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정면으로 반박했던 미안함을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베개를 구매한 이유를 아내에게 설명했지만, 아내는 그날의 일들이 기억이 없는 모양이었다. 다만, 베개가 마음에 들고 편하다는 것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내는 못내 서운한 모양이었다. 그 정도 추억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진 것이 아쉽고, 행복한 날의 기억이 언젠가 모두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도 있어 보였다.

기억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의 기억이 되어 주리라고. 가능한 오랫동안 곁에서 기억의 빈자리를 채워주겠다고 말이다. 그 약속을 지키고 싶은 마음을 글에도 담아본다. 약속을 더는 지키지 못하는 날이 오더라도, 이 글이 언제 어딘가에서 그 빈자리 한 곳을 채워줄 수 있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글·사진 채동균(혜윰뜰도시농업공동체)

 

 

채동균…

영국의 시인 William Wordsworth를 동경하여 영어영문학
을 전공하였으나, 사회 생활을 IT 기업에서 시작하는 비운
을 겪으며, 평생 생업으로 시스템 엔지니어로 활동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우연한 계기로 주민대표를 4년간 맡은 인연
으로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대표가 되었다. 생업과는 별
개로 마을에서는 주민공동체 활동, 문화강좌 프로그램 기
획 등으로 이웃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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